누구를 위하여 저작권은 울리나

# 134 at 2009년12월20일 09:25 by 비전 디자이너


아직 국내에 번역-소개되지는 않았지만, 미국 하버드 로스쿨의 인터넷과 사회를 위한 버크만 센터(Berkman Center for Internet and Society. 링크 : http://cyber.law.harvard.edu)의 센터장으로 있는 요하이 뱅클러(Yochai Benkler)는 네트워크 정보 경제 사회의 제도적 생태계(institutional ecology)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경제학의 ‘아담 스미스’와 같은 사람이다.

여기서 그를 아담 스미스에 견준 이유는 첫 번째로, 아담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가격기구에 의한 경제참여자들의 생산, 분배 행위를 설명한 것처럼 요하이 뱅클러가 네트워크 정보 경제 사회의 참여자들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현상인 자원봉사자들에 의한 비경제적 동기에 의한 생산, 공유를 확산시킬 수 있는 제도적 생태계를 구상하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독점적인 기존 저작권에 대한 대안으로서 인터넷의 자유로운 콘텐츠 생산, 공유를 확산시키기 위하여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CCL)를 공동 창설한 로렌스 레식(본래 스탠포드 로스쿨에 있다가 지금은 뱅클러와 같이 하버드 로스쿨로 옮겼다) 같은 이쪽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법제적, 정책적 연구도 그 기본은 위와 같은 요하이 뱅클러의 프레임워크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그와 같은 대부적인 측면에서 요하이를 스미스에 견주어도 모자라지 않다.

두 번째는 우연인 지 의도인 지는 모르겠지만 아담 스미스의 책 제목이 ‘The Wealth of Nations’(국역 : 국부론)이었는데 요하이 뱅클러의 책 제목은 ‘The Wealth of Networks’(네트워크 부론)이다.

아담 스미스가 책 제목에 넣은 ‘국가’라는 개념은 1648년 지리한 신·구교간 전쟁이 종결되면서, 교황과 황제 중심의 종전 체제를 깨고 개별 국가를 중심으로 한 오늘날의 ‘국제관계’가 형성되는 시대적 배경 아래 등장한 것이다. 국부론이 영국에서 출판된 것은 1776년인데, 황제가 교황에게 무릎을 끓어야 했던 카노사의 굴욕이 1077년, 면죄부 판매가 극심하여 루터가 반기를 든 것이 16세기인 것을 생각할 때, 그와 같은 ‘국가’ 중심 체제로의 변화라는 시대적 흐름의 지속과 그에 연결된 새로운 경제환경이 아담 스미스에게 그 경제환경에 대한 통찰의 결론과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책을 작성하게 만들었다고 보인다.

마찬가지로, 요하이가 쓴 책도 1940년 중반 컴퓨터가 개발되고, 1990년대 들어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2000년대초 IT붐 폭락을 거쳐 최근의 웹2.0 부활에 이르기까지의사회적 환경의 변화와, 그 변화가 보편화시킨 자발적 유저들의 참여에 의한 창조적 생산과 공유라는 새로운 사회 현상이 없었다면 쓰일 수 없는 책이었다.

만약, 뱅클러 요하이가 책 제목을 ‘The Wealth of Nations’로 단 것이 의도적이었다면. 그 의도란-필자가 가늠하기에는-아담 스미스가 주목했던 것이 ‘국가’라는 조직의 부였다면, 요하이가 본 것은 이용자들의 소유도 없고 경계도 없이 공동의 이상과 지속적 참여에 따라 움직이는 ‘네트워크’라는 것의 부이고, 따라서 아담 스미스의 시대 환경과 자신의 시대 환경이 다르니 이제는 국가가 아니라 기존 산업 조직이 아니라 네트워크에 초점을 맞춰서 이용자들과 사회 전체의 후생 향상에 목적을 두고 제도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실제로 난해한데다가 길기까지 해서,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케인즈의 일반이론 등이 그 사색과 통찰의 풍성함과 깊이에도 불구하고 읽히지는 않아서 고전으로서 품위는 지키고 있지만, 원작자들의 본의와 다른 해석들이 남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요하이의 ‘네트워크 부론’도 적어도 필자가 읽기에는 어렵다. 이 책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해당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이 경우에는 IT 뿐 아니라 경제학·정책학에 대한 어느 정도 깊이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설프게나마 해독해 낸 결과물로서 책의 주장을 전하고자 한다면, 요하이는 산업시대에 기초하고 있는 정책, 법이라는 것은 기존 비즈니스 모델을 안일하게 고수해서 수익을 남기고자 하고 이용자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한 창조적인 새로운 사회적·문화적 생산과 공유의 형태에 무관심한 기업에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유리함에 반대해서 그가 네트워크 정보 경제 환경에 걸맞는 새로운 정책과 법을 제안하고 그것을 통해서 제도적 생태계의 구조를 다시 생각하고자 하는 근거는 그들 기업에 유리함을 반대한다는 것이 반상업적 내지 반시장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저들 유저의 자발적 참여·공유·생산의 ‘비시장성’에 ‘네트워크의 부’가 미래의 새로운 창조성·가능성 그리고 생산성이 숨어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경제적인 가치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문화적인 가치에서도 그렇다. 경제적인 부분이야 인터넷 상에서 이미 생산된 정보가 분배되는 데 드는 한계비용은 ‘0′에 가깝고 따라서 그에 존재하는 정보의 가격은 장기적으로는 그 한계비용에 수렴하는 것이 경제학 이론에 걸맞기 때문에 일리가 있다. 즉, 유저들에 의한 ‘공짜’ 참여·공유·생산은 넷 환경에서는 경제학적으로 볼 때 하자없는 이해라는 것이다.

최근 ‘롱테일’의 저자 크리스 앤더슨이 출간한 책 ‘프리’(Free)라는 책의 내용의 골자도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이 새로운 경제환경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기업들은 이 ‘0′의 중차대함을 깨닫고 그들 비즈니스 모델, 전략에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는 것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강조하고 있다. (구글 CEO 에릭 슈미트도 맥킨지 쿼터리와의 인터뷰에서 ‘0′의 중요성을 각인하는 것이 새로운 비즈니스 환경에서 중요함을 강조한 바 있다. 해당 인터뷰 링크:  http://www.mckinseyquarterly.com/Googles_view_on_the_future_of_business_An_interview_with_CEO_Eric_Schmidt_222)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그 같은 유저 창조성의 의미가 더 깊다. 전통적으로는 상업적·문화적(정치까지 포함하여) 늘 수동적인 입장만 취하고 있던 유저들에게 그들 만의 ‘네트워크’란 생산·분배의 채널이 있어서 정치적 목적과 상업적 이해관계에 무관한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기존 판을 형성하고 있는 조직 체에 의존하지 않고도 그들의 의사를 표현하고 개진하고 주장할 수 있는 발판을 자발적으로, 유기적으로 그리고 역동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창조성의 민주화’ 혹은 ‘창조성의 다원화’를 네트워크 정보 경제 환경에서 제도 생태적 관점으로 이루는 데 핵심은 법의 조력을 통하여 이 흐름을 방해하려고 하는 기존 산업계의 옹호자들과 ‘전쟁’을 치루는 것이다. 실제로 요하이는 전쟁(battle)이라는 말을 그의 책의 소제목으로서 자주 이용한다. 저작권·특허권·상표권 등의 다양한 법제의 기원과 배경, 산업에 미치는 영향, 기존 산업계에서 주장하는 바의 근거에 대한 객관적 연구의 조사 등을 통해서 그가 밝히고자 하는 바는 “저작권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냐”하는 것이다.

인터넷에 유저 창조성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등장했다. 그들은 기존 산업계에서 쓰지 않는 ‘네트워크’라는 그들만의 생산·분배 네트워크를 사용한다. 때때로 그것은 국내에 해운대 불법CD 유출사건처럼 상업적으로 큰 침해를 일으킬 수 있는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범인에 대한 처벌을 엄격히 해야지, 범인이 아닌 네트워크를 잡으려고 했다가는 이용자 창조성이 공멸되는 결과에 처하고 그에 따라서 상업적 이해의 손실 못지 않은 사회 전체 후생의 감소를 경험하게 된다.

물론 기술 발달과 법제 발달은 바이러스-백신과의 관계와도 같아서 법제가 엄격해지면 기술은 그 법망을 교묘히 피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법의 적용이라는 것도 그것이 더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계는 많은 실제적으로 그와 같은 네트워크를 의식없이 이용하는 많은 대다수의 유저들을 법적인 ‘죄인들’로 만드는 결과와 함께 한다.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때 요하이가 여지없이 단죄의 대상인 불법 콘텐츠 유포자들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문제시되는 ‘김본좌’, ‘정본좌’ 등의 불법 야동 유포자들에 대해서 그가 옹호했을까. 나는 의문이다. 그러나 교통사고가 자주 난다고 해서 고속도로를 철폐하는 것은 말이 안 되 듯이, 네트워크가 그와 같은 불법의 무대가 된다고 해서 네트워크를 통제한다는 것은 빈대 잡다가 초갓집 태운다는 속담의 제대로 된 적용이다. 요하이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네트워크를 통한 생산·분배를 통해서 문제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이용자 참여를 오히여 더 늘림으로써 자정 작용으로서 해결해야지 무리한 법제의 도용으로 그 가능성을 억제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0′의 영역인 네트워크 경제원리에 걸맞지 않을 뿐더러, 상호 참여로 발전하는 네트워크 문화원리에도 이질적이다.

개인적으로 한국 영화, 드라마의 오랜 팬이고, 혼자서 가끔 습작으로 시나리오를 쓰는 취미를 가지고 있고, 홍콩과 대만에 살면서 한류의 열기를 체험한 바가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 국제적 현상에 대한 해외인들의 반응에 관심이 많다. 그 최근 흐름을 보기 위해서 가끔 방문하는 사이트가 www.mysoju.com이다. 한국·일본·홍콩·대만 그리고 중국 대륙의 드라마·영화들의 비디오 정보들을 수집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곳이다. 화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감상’의 측면이라기보다는 며칠 안 되서 바로바로 올라오는 비디오 정보들에 이용자들이 ‘손질’을 한 것을 ‘확인’하는 측면에서 가끔 가보게 된다.

분명 국내에서 본방한 지 얼마 안 된 드라마인데 보통 5개국어로 자막이 달려 있고 번역자들의 주요 씬들에 대한 코멘츠를 비디오를 감상하면서 볼 수 있는데, 그러한 부분들이 흥미로워서 자주 간다. 물론 이 비디오 원재료 등은 저작권 법의 영역에 있고 따라서 이렇게 무단으로 자막을 붙이고, 커멘트를 다는 것은 저작권 보호기간이 만료되서 공공 영역으로 넘어간 원재료에 그와 같은 행위를 하는 것과는 다르지만. 미래의 리믹스 컬처가 어떻게 전개될 지 가늠하는 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느낌 때문에 재미있다. 나중에는 내가 내 노트북·스마트폰 혹은 무엇을 가지고 무언가를 볼 때는 같이 그것을 보는 사람과 ‘소통’하고 ‘공유’하고 그래서 거기에 무언가를 ‘창조’ 할 수 있는 것일까. 본방된 지 며칠 되 지도 않아 수개국어 번역과 커멘트를 달아내는 유저들의 활동들을 보면 그것은 이미 충분히 가능한 일로 보인다.

또 한 가지는 이 사이트에서 주장하고 있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항목이다. 사이트 하단에 보면 자기들은 다른 UCC 공유 사이트들에서 ‘링크만 걸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된다는 내용인데.

첫째는, 미국에서 eBay v. Bidder’s Edge 판례에서 옥션 사이트의 링크 서비스를 제공했던 후자에 주법원이 전자의 손을 들어줬던 경우가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됐던 것은 만약 후자를 통해 옥션된 상품을 구매하게 되면 비록 그 상품 판매자가 전자에 등록했다 할 지라도 후자의 조건들에 따라서 상품을 판매해야만 하고 또한 사이트 방문 트래픽이 줄어 들어서 광고 수익이 감소하기 때문이다. 링크라는 건 넷환경에서 이용자 표현 수단 중 하나이지만 이처럼 서비스 제공자의 상업적 이해관와 연루되면 법적 소송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즉,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지 않더라도 저작권 법을 넓게 적용하면 수익구조의 침해 등에 대한 명목으로 법적 소송의 대상이 될 근거가 있다.

(이 부분에 관심이 있으면 요하이 뱅클러의 ‘네트워크 부론’ p.451을 읽어볼 것. ‘네트워크 부론’은 인터넷에서 전문 읽기와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링크 :http://cyber.law.harvard.edu/wealth_of_networks/index.php?title=Download_PDFs_of_the_book)

둘째는 실제 저작권 소유자들이 그렇다면 소송을 건다고 했을 때 누구를 ‘대상’으로 소송을 걸 것인가하는 부분이다. p2p 네트워크가 문제가 됐을 때, 차라리 처음에 MP3.com을 상대하는 것이 편했다. 그 후의 냅스터, 그리고 냅스터가 법원 판결에 따라 문을 닫은 이후,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다양한 p2p 사이트들은 ‘누구를 책임으로 삼을 지’가 불분명한 것이 그 특징이다. 그렇게 지능적이라는 점에서, 해당 사이트의 법적 책임이 없다는 주장의 타당성도 일부 납득이 된다.

(p2p 네트워크의 발전에 관련된 법적 공방에 대해서는 위의 책 p. 418을 참조할 것. 위의 링크를 타고 가서, 책의 본문을 다운로드하여 확인하면 된다.)

아담 스미스에 견주어 인터넷 산업환경의 법제에 대한 선구자 요하이 뱅클러를 소개하다가www.mysoju.com 으로 넘어온 까닭은, 그의 책을 요즘 필요에 따라 천천히 다시 읽으면서 느끼는 바를, 해당 사이트를 잠시 둘러보면서 다시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저작권법의 보수적 적용에 따라 반동적으로 발전하는 인터넷 기술과 그 반대편에 존재하는 유저들의 창조성이 공존하고 있다.

이에 따른 법적인 고민은 사실상 ‘창조적 균형점’을 어디에 잡느냐 하는 데 있다. 콘텐츠 저작권 보유자들에게 창작의 동기를 부여해주는 동시에 자유롭게 유저들이 웹공간을 통해 공개된 콘텐츠에 참여해서 새로운 창조성을 발휘하는 문화를 공존시키기 위하여 우리는 어떤 저작권, 어떤 법제, 어떤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가. 정답은 정해지지 않았다. 그것은 앞으로도 더욱 고민하고, 만들어져야 할 영역이다.

다만 우리에게 남은 몫은 맞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누구 한 사람, 소수, 특정 산업에 유리한 것이 전체 사회의 후생 발전과, 네트워크 정보 경제라는 새로운 사회의 플랫폼,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등장하는 사회적 생산성과 창조성의 증대에 앞서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요하이의 비원인 동시에 우리가 공감하고 동의하고, 함께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록 우리의 생각이 그의 생각과 완전히 동일하지도, 그럴 수도 없다고 할 지라도. ‘전체’와 ‘미래’를 내다보고 신중하게 법과 정책을 일부의 주장, 이익이 아니라 사실과 전망에 근거하여 짜내야 한다는 성찰을 완전히 배제시키기 어렵다.

여기 글의 제목이자, 열린 결론을 던진다.

(인터넷이 준 새로운 기회에 걸맞는 새로운 소셜 아키텍처를 고민하며)

누구를 위하여 저작권은 울리나.